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명시모음

기타 시와 문학/시학

by 석란나리 2009. 10. 13. 21:35

본문

해에게서 소년에게

[최남선]

『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泰山)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者)가,

   지금(只今)까지, 없거던, 통지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고만 산(山)모를 의지(依支)하거나,

   좁쌀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데를,

   부르면서 나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者),

   이리 좀, 오나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적은 시비(是非) 적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世上)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世上)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中)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膽)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才弄)처럼, 귀(貴)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少年輩)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국화옆에서

서 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김 영 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잊고저 - 한 용 운


남들은 님을 잊고저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가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서시

윤 동주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타 시와 문학 > 시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창작 자료  (0) 2009.12.28
문학의 흐름  (0) 2009.12.28
여백(餘白)의 미학(美學)  (0) 2009.12.12
백석의 시 모음  (0) 2009.10.13
백석의 시풍  (0) 2009.10.0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