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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시와 평

기타 시와 문학/시학

by 석란나리 2009. 12. 2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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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작에 관한 시평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김성규<2004년 동아일보 당선작>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신춘의 지면을 장식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김성규씨의「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된 단점들이 비교적 적게 살펴졌던 까닭이다.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들간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겠다." <선작평>-김종호, 김명인

대개 신춘문예에 관련한 평가상 화두는 주로 새로운 작품이나 우수한 작품이 예년에 비해 없다는 자조적인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모두에 밝혀 두었다. 수백 수천 편의 작품을 일회성 그것도 단기간에 심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리란 점이다. 또한 여러 곳의 심사를 맡는 중견시인들과 평론가가 보게되는 작품이라야 신춘문예용으로 정형화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니 당연한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결과로 '신춘 지면을 장식하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작품이 당선됐다는 말 이면에는 언론의 문인 선발에 관한 것 못지 않게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문제를 가진 것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결과로 보인다' 이는"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탓인지, 작품의 개성이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서는 별다른 진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문 투의 엇비슷한 넋두리도 여전하였으며, 한 두 편 돋보이는 응모 시만으로는 그 가능성 또한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라는 말에서도 역설적으로 짚어 볼 수있는 말이다.

문학작품이란 격렬한 감동을 경험하고 그 감동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작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욕구의 기저란 어떤 특별한 상황을 마음 속, 또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란 자신만이 이해하는 환상과는 달리 시대와 가치 그리고 문화, 종교간 의사소통을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한다. 코울리지나 스테판 스펜더가 말한 것처럼 작품에 생명력을 주기위해 상상력을 집중시켜야 하는 고통스런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적은 우열과 경중으로 순서를 따질 수 없는 인간 역사의 궤적이며 가치다. 과거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사실이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져 있을 때, 작가는 상상력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돌멩이 하나, 돌에 새겨진 그림이나 글씨, 무덤에서 발견되는 여러가지 부장품 등을 보면서 작가가 지닌 상상력을 불어넣어 현재에서 과거를 재구성 해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이 주는 특정 경험을 디테일하게 나열한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전체적으로 통일된 질서로 재편하거나 깊은 시적 통찰력을 보여줘야 한다.

시인이 일반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감정과 상상력의 차이일 것이다. 우드베리는 "시인의 특징은 열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삶 속에 몰입하는 것"이라 한 바 있다. 이 열정이란 결국 상상력을 가진 정서라고 볼 수 있다. 당선작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는 작품의 전개가 평면적이고 언술이 상당히 서술적이다. 따라서 시적인 긴장도 느슨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별반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유적을 보면서 상상하는 영감이 과거와 현재를 교통시키는 그 어떤 문제와 막닥뜨리는게 하나도 없다는 문제이다. 남다른 감각이란 생동감있는 반응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유적을 통해 인간의 생활은 물론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읽어내는 동력을 詩化하지 못한 이면에는 평면적인 서술에 치중한 탓이라고 본다. 그러나 심사자는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암울한 세태를 드러낸 것인지 알수없으며 또한 수사적 절제라는 것도 확연하지 않다. 작품간 편차가 심했다는 말을 볼때, 창조적인 상상력의 확산이 아직 미비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유적 - 예현연 <2004년 한국일보 당선작>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예현연의 '유적' 등 7편은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심사평>-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이번 심사평을 보면서 의아스럽게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 장르의 특성상 당대의 현실을 담기엔 부적절하다? 참으로 의문스러운 말이다. 시란 자기의 인식을 드러내는 표현수단 중 하나이다. 자신의 감정,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용한 장르라고 본다면 사회적 병리현상의 뻔한 결과는 담을 수 없다는 표현은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시인의 삶이 동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삶 전체의 절박함과 가까울수록 더더욱 공감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당선작 예연현의 <유적>은 역으로 개인의 일상적인 작은 경험의 알갱이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개인의 내면성은 심미적으로 밝혀 줄지언정 외부현실에 대한 지성적 고찰은 사라진다는 점에서 반지성적인 문제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의 절박한 현실반영이 사라지고 개인적 상황에서 도출된 삶의 양상이 시적 상상력의 중심이 된것은 90년대 이후이다. 결국 뉴밀레니엄 시대라고 호들갑을 떠는 2000년대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작 이슈가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80년대에 암울한 시대 상황과는 달리 세련된 수사들이 시작에 득세한 것처럼 2000년대 초반 모든 가치의 해체를 감당해내는 역동적인 시작보다 정태적인 질서와 조화 일상의 세밀한 관찰을 중시하는 주변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달관한 중견원로들의 시각인지 모르겠다. 작품으로 돌아가서 예연현의 <유적>은 유적관에서의 대면하는 '금간 항아리'-'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고리 끊어진 장신구'에 대한 묘사이다.

어떤 사물의 모양, 빛깔, 느낌, 냄새 등을 마치 그림 그리듯이 글로 생생하게 나타내는 것을 묘사라고 한다. 시인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진술들의 연속이고, 조각가의 세계는 사물들의 가시적인 병렬에 있다는 말을 한다. 본질을 감정이 아닌 관찰에서만 근거하여 묘사하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작품은 화가나 조각가처럼 작품을 파악하고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질료인 시적 언어에 조각과 같은 조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사물을 보면서 시선의 이동에 따른 짧은 단상을 연결시켜놓은 듯한 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작품 속에는 어떠한 역동성과 실험성이 나타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선자의 말처럼 내용이 신선하다거나 작풍이 새롭다거나 하는 작품보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을 선작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운문으로 잘 짠 보고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시의 일차적 기능이라고들 하는 새로움이 없다는 말이 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2004년 경향신문의 당선작을 살펴보자.

가스통이 사는 동네-안성호<2004년 경향신문 당선작>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안성호씨의 <가스통이 사는 동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가 동의한 것은 이 작품이 앞서 말한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비교의 차원에서 안성호씨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안성호씨가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시, 그래서 그것을 들으면 아, 안성호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시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동맥경화에 걸린 한국시를 벌떡 일어서게 할, 젊은 시의 쌩쌩한 육성을 듣고 싶다."<심사평>-김승희, 황지우

과거 대부분의 시들에게 있어서 특정한 주제를 해석하는 기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면 요즘의 시들은 주제적인 전략보다는 현실의 특정한 징후들을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기능이 우세하다. 제시의 기능은 현상을 파악하는 개성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라는 것이 앞서 심사자들이 지적한 문제와 관련하여 볼 때 당선작 역시도 그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면 "모든 응모자에게 공통된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을텐데 이미지의 과잉이나 어휘의 낭비로 인해 시가 딱 시로서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어제 먹은 파리 바게트에 들어 있는 이스트가 주는 이분의 일 박자 부푼 템포가 레코드점의 철 지난 마돈나와 맞물리면서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구절처럼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다. "요즘 시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 '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에 작동하는 유질동상(類質同像)은 본디 '혼돈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명석한 것'이라는 시의 초기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라는 말은 당선작도 이런 평가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적인 관심이 넓고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만큼 상상력의 확산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의 확산은 반드시 고유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문학이 당대의 모든 사상事像들을 통찰력있게 분석한다거나 기존의 몰가치에 적극적인 대항력을 가지는 동적인 에네르기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가스통이 사는 동네>는 눈 앞의 풍경을 스넵 숏으로 인식하고 그 찰라적 접점에서 다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시적 상상력이 신비로움을 가진다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감각적인 지각이 엄청난 팽창을 가져오는 것과 단편적인 이미지의 연동 등이 인상주의적 성격이 물씬 풍긴다. 이는 시각적인 것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성격과 닮아있다. 역으로 말하면 이미지의 난립은 아니지만 이미지의 연결이 어떤 경향성을 지니고 총체적인 의미의 구조물을 조직해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후반부 연에 가서는 행구성이 상당히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다. 마치 선禪적인 기교를 부린것 같아 눈에 거슬린다. 작품성을 두고 거칠다, 서툴다, 세련됐다, 판에 박혔다는 평가는 가치평가상 맞지 않은 말일지도 모른다. 흄볼트는 언어를 산물(ergon)이 아니라 활동(energia)라고 한 바 있다. 작품의 탁월함이란 결국 언어의 세련도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드러내는 일이라는데 초점을 둬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세련된 수사와 이미지의 연동, 찰라적 접점에서의 묘사 외에 크게 두드러진 혁신적 모티브는 없어 보인다.

신춘문예를 통하여 혁신적인 많은 작품이 선작되는 것은 언론이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선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해마다 많은 당선작을 내놓고 있는 신춘문예가 소재의 빈곤과 내용의 정형화 그리고 비일비재한 표절의 문제및 심사자들의 중복은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다. 그 이면에는 구조적으로 신춘문예가 갖고있는 상당한 이유를 공론화하여 이를 혁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문이 문학권력화하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재획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첫째는 일부 심사자들의 중복문제이다. 중견이나 원로들이 계속적으로 중앙지나 지방지의 신춘문예 심사자가 됨으로써 신춘문예가 마치 기성의 문학패턴을 답습하는 재생산기지가 되게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특정 심사자들의 편협한 선작 풍토가 혁신적인 작품생산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언론도 일부 문인들의 명망을 빌고자하는 문제도 개선되어야 하듯이 매명하려는 문인들의 태도도 자제되어야 한다. 아직 신춘문예 심사위촉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개인적으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신춘문예의 심사자가 되는 것이 무슨 개인적 권력과 명예를 내세우는 것에 일조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따라서 일부 고정된 심사자로 위촉된 문인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유독 문인사회는 민주적이지 못한 병폐를 가지고 있다는 쓴소리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둘째는 선작된 작품에 대한 논의를 중점적으로 검증해 낼 수 있는 시평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당선작은 보통 한 작품만 선작된다. 따라서 선작의 경위나 선작평에 대한 이해를 도우기 위해 차선작을 공개하고 그 작품과의 차별성을 검증할 수 있는 논의를 도와야 한다. 이는 선작 경위및 선작에 대한 시비를 줄일 수 있는 장치로서 좋다고 본다. 혁신적인 신인발굴 취지에 맞게 작품성이 탁월하다면 때에 따라서는 다수의 신인을 뽑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셋째는 표절시비에 대한 문제이다. 많은 작품을 심사해야 한다는 변명이 옹색해 보일정도로 당선작에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은 것은 근본적으로 선작에 대한 경위를 의심케한다. 일부에서는 기존 당선작을 재작업하여도 당선할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이다. 특히 선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에서 보면 자칫 선자의 문학적 안목이 매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현재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공개 되고 있고 쉽게 일반인도 그 공개된 작품간의 특성에 유의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심사자들이 표절 시비를 불러 일으킬 만큼의 작품에 대하여 사전 논의가 없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있었다면 충분한 논의를 공개했어야 옳다는 점에서 기존의 선작평들은 너무 무성의 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이다.

넷째는 아직도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 무슨 개인의 문학적 위상을 제고한다는 인식은 사라져야 한다. 실제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문인의 수보다 문예지로 등단하는 문인의 수가 거의 두배 이상 되지만 오히려 등단 방법을 선호도를 보면 신춘문예가 문예지 등단 선호도의 두배 이상인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이러한 문인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암묵적으로 문단권력을 숭배하는 전근대적인 발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아직 어떤 곳을 통하여 등단했는가에 따라 작품성은 따지지 않은 채 그 문인의 평가를 단정적으로 행하는 세태와 꼬리표 달기(등단 연도와 등단처)는 문학의 성과가 문인의 전생애를 통하여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다섯째는 최종적으로는 문인선발에 대한 권리를 신문은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
언론이 연초에 문학적 위상을 제고하는 듯한 신춘문예의 실시는 그 지원책에 있어 더더욱 열악한 지방지까지 가세하여 단지 문인양산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문예지의 난립과 함께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또한 언론의 이해에 따라 특정인의 특정 시집과 소설집에 대한 스포트를 통해 문학적 성과에 대해 이해가 상반되는 작품이 충분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없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기현상은 문학이 언론과 출판자본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문학적 위상이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문학의 현실에서 건전한 문학적 담론이 자생적인 토대를 갖게하고 문학적 신념이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문학을 이벤트화나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아야 할것이다. 문학인의 선발은 문학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신춘문예의 포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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