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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임보 시인의 생각

기타 시와 문학/시학

by 석란나리 2013. 9. 1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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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대한 임보 시인의 생각>

2013년 현재까지 나는 1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반세기의 문단 경력을 지닌 문인치고 대단한 업적은 아니다. 처녀시집 『임보의 시들<59-74』(1974)는 15년 동안의 작품집인데 30여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10년 뒤에 나온 제2시집 『산방동동』(1984)엔 45편의 작품이 실려 있으니 초기의 내 시작 활동이 얼마나 게을렀는지 짐작할 만하다.
내 시작활동은 《진단시》와 《우이동 시인들》 동인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 활성화된다. 『목마일기』(1987)『은수달 사냥』(1988)『황소의 뿔』(1990)『날아가는 은빛 연못』(1994)『겨울, 하늘소의 춤』(1997) 등의 시집들이 2,3년 간격으로 출간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 동안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문학적 작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운율에 대한 자각

현대시가 정형시의 틀을 깨고 자유시가 되면서 윤율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말하자면 자유시는 운율과 무관한 시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모든 글은 숙명적으로 운율을 달고 있다. 시에서 분행 곧 행을 배열한다는 것은 운율의 형태를 결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분행을 잘 하는 일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최선의 운율 장치를 하는 작업이다.
운율 곧 리듬은 우주 자연의 동적 구조다. 천체의 운행, 사계의 변화, 주야의 반복, 동물들의 보행, 심장의 박동, 호흡 등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형태가 율동이다. 이러한 율동의 구조 속에서 수만 년 살아온 생명체는 리듬이 체질화 되어 있으므로 리듬 속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리듬 때문이다. 문학 가운데 가장 음악적 요소를 많이 지닌 장르는 시다. 시의 운율은 독자들의 심금을 흔드는 중요한 장치다. 소월이나 미당의 시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은 다 아름다운 운율에 실려 있는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1980년대에 들어 운율에 대한 자각을 새롭게 하면서 「律」연작을 시도했다. 그 결과가 『목마일기』(1987)와 『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학위논문「한국현대시운율연구」(1988)를 통해 ‘내재율’의 이론을 정립했고, 운율에 관한 다양한 논문들을 모아『현대시운율구조론』(1999)을 엮어냈다.

둘째, 설화시와 선시(仙詩) 모색

현대시가 너무 자유분방한 나머지 난삽한 상태에 이른 것도 같다. 무절제한 독백이나 복잡한 내면 심상을 쏟아내는 배설적 진술이 시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면서 시단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시가 따분하고 골치 아픈 글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게 되어 시를 멀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를 어떻게 흥겹고 재미있게 만들어 시에 대한 독자들의 환심을 다시 회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그것이 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운율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시의 감동성 회복 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방법의 하나로 내가 생각한 것이 시에 서사성(敍事性)을 도입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설적인 요소 곧 스토리를 시에 끌어들이는 일이다. 시의 서사성은 과거의 서사시라든지 백석이나 지용의 산문체 시에 이미 있었던 것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서사성이란 그런 거대 서사는 물론이고 짧은 서정시도 이야기 형식으로 짜 보자는 것이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오래 기억된다. 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의 장르 명칭을 설화시(說話詩)라 부르기로 했다.
설화시를 생각하면서 처음 시도한 것이 선시(仙詩) 연작이었다. 불교의 선시(禪詩)가 아닌 신선(神仙) 사상을 다룬 작품이다. 선(仙)의 세계란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에 다름 아니다. 선경(仙境)은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평화와 자유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생각했던 비공술(飛空術)이나 축지법(縮地法) 같은 소망은 오늘날 비행기나 고속열차 등이 만들어지므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 선사상은 우리의 내면에 맥맥이 흐르면서 현실을 개선해 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1998)에 수록된 작품들은 다 선시다. 화자가 천상의 신선세계를 주유하면서 그가 보고 겪은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적은 연작 형식의 시들이다.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 낸 신선세계가 겉으로 보기엔 허황된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지상적 세계에 대한 비판이며 지상적 삶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이다. 내 딴에는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야심적인 결과물이어서 좋은 평을 기대했었는데 막상 시단에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세상과의 사이클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에 설화시들만을 모은 사화집이 『장닭설법』(2007)인데 이 시집으로 2007년 <시와 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셋째, 사단시(四短詩) 장르 설정 시도

서사시나 장시 같은 긴 분량의 시도 없지 않지만 시의 형식은 원래 짧음이 그 특징이다. 아니, 시는 가급적 짧을수록 이상적일지 모른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부담을 덜 주는 짧은 글이 독자에게 더 어필할 것도 같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는 17음절로 된 일본의 하이쿠(俳句)인데 수천 년 동안 그들의 국민시가로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우리에게도 평시조라는 전통적인 짧은 형식의 시가 있지만 하이쿠보다는 긴 편이다. 그래서 하이쿠에 준하는 짧은 형식의 민족시를 우리도 창안해 내서 국민 전체가 즐길 수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192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시에서 10행 미만의 단형시를 조사해 보았더니, 4행시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곧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4단 구조가 단형시에서도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만 년 동안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풍토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성정에 4단 구조는 친숙하게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사단시 곧 네 마디 짧은 시를 시도해 본 것이다.
한 마디는 작게는 1음보(대개 4음절)로부터 많게는 4음보까지 허용된다. 한 마디가 평시조의 한 행 분량인 4음보를 초과하면 길게 느껴져서 단시로의 특징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사단시의 가장 짧은 형태는 네 마디가 각기 1음보만으로 이루어진, 전체 4음보(16음절 이하)가 되고, 가장 긴 형태는 네 마디가 다 4음보로 이루어진, 전체 길이가 16음보가 되어 평시조보다 길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네 마디가 다 2음보로 된 전체 8음보 내외의 길이다.
사단시는 준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네 마디로 이루어지며 한 마디가 4음보 이내라는 규정이 있지만, 각 마디의 길이를 신축성 있게 조절할 수 있는 자율이 허용된다. 시를 압축하다 보니까 미진한 점이 없지 않아 작품의 말미에 주(註)를 달아 작품의 이해를 돕는 해설을 붙이기도 했다. 사단시에 대한 내 작업의 자취들은 『운주천불』(2000)과 『가시연꽃』(2008)에서 만나볼 수 있다.

넷째, 비판적 풍자시와 자연 친화적인 시

내 시가 지닌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풍자성이다. 세상은 한 마디로 모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자체도 유한과 무한을 공유하고 있는 역설적 구조지만. 생명의 조건도 양과 음,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미움 등의 이율배반적인 모순구조라 할 수 있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시인들은 세계가 지닌 이런 모순 구조에서 발생한 갈등들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된다. 시집 『황소의 뿔』(1990)과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2002)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개 이런 비판적인 안목으로 쓴 풍자시들이다. 위의 시집들뿐만 아니라 나의 많은 작품들은 문명비판, 사회비판 그리고 우주적 모순구조에 대한 풍자 의식이 깔려 있다. 근자에 간행된 『아내의 전성시대』(2012)도 이 범주의 시집이다.
한편 이런 비판적인 풍자 정신과 더불어 내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연 친화의 사상이다. 문명이나 사회 비판 정신과 자연 친화의 사상은 겉으로 보기엔 다른 것 같지만 실은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위적인 문명이나 제도적인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과 동궤의 것이 아니겠는가?
전원에 대한 동경과 자연 친화적인 성향을 띈 작품들이 시집『자연학교』(2004)와 『눈부신 귀향』(2011) 그리고 꽃과 식물들을 노래한 『자운영꽃밭』(2013)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섯째,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에 관한 모색

나는 에세이「詩≠시≠Poetry」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우리 ‘시’는 중국의 한시나 서구의 어떤 시와도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전통 음식이나 의상이 고유한 것처럼 한국의 현대시도 우리만의 개성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시를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외국의 시 이론을 끌어다 금과옥조로 삼을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한복을 지으면서 양복 만드는 법을 바탕으로 삼으려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한국의 현대시는 서구시 이론에 너무 많이 의존해 와서 우리다운 특성을 많이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다운 특성을 살려 한국시의 정체성을 수립해야 되리라 믿는다. 한국 현대시의 출발도 한 세기가 지났으니 이젠 그럴 만한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풍토와 우리민족의 성정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시가 어떤 것일까를 고구하여 우리시의 이론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모든 글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시 역시도 시인의 욕망의 산물이다. 그런데 시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욕망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역대의 좋은 작품들을 살펴보건대 그 속에 담긴 시인의 욕망은 물질에 대한 욕구나 출세 지향적인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속적인 욕구를 억제해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를 ‘승화된 욕망’이라 부르는데, 그 승화된 욕망은 진 선 미를 중요시하고, 절조(節操), 염결(廉潔), 친자연(親自然)을 지향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소중히 여겼던 선비정신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한국시의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무릇 좋은 글이란 좋은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잘 표현했을 때 가능하다. 좋은 시 역시 좋은 내용을 적절한 표현 형식에 담았을 때 가능하다. 좋은 시 내용의 바탕이 되는 것은 시정신 곧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한 표현 형식이란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산문과는 달리 시가 되게 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를 나는 시적장치라고 이르는데 이것이 또한 시와 비시(非詩)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시적 장치, 곧 시다운 표현의 특성을 나는 세 가지로 잡고 있다. 은폐지향성(감춤), 과장지향성(불림), 그리고 심미지향성(꾸밈)이다. 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근히 감추어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 은유, 우의, 전이(轉移)의 기법들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시는 사실보다 더 불려서 표현하려는 성질도 있다. 과장, 역설, 활유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한편 시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글이어서 시어를 잘 다듬고, 운율을 중요시하며 대우의 기법 등을 구사해서 조화롭게 꾸며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시적 장치가 지닌 이 세 가지 경향― 감춤, 불림, 꾸밈을 ‘엄살’이라는 말로 통합해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정의를 간략하게 한다면 시정신(선비정신)이 시적 장치(엄살스럽게)를 통해 짧게 표현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시 정신과 시적 장치에 관한 그 동안의 내 이론들은 시론집『엄살의 시학』(2000)과『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2009) 등에 수록되어 있다.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한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 졸시 「바보 이력서」전문,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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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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