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꼽은 지난해 최고의 시는 안도현의 '일기'였다.
도서출판 작가가 12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에게 지난해 가장 좋은 시를 추천받은 결과, 계간 '시인수첩' 가을호에 실렸던 안도현의 '일기'가 꼽혔다. 시집으로는 박형준시인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 지성사)가 선정됐다.
작가는 또 지난해 발표된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았던 작품으로 박형서의 단편'아르판'과 한강의 장편소설<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을 선정했다.
(중략)...
일기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
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
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
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
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
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
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말고 무
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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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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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
안도현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
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
용두질이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
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말리는 단풍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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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안도현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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