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허난설헌
각씨방에 찬 기운 스며드니 긴 밤은 멀었고
텅 빈 뜨락에 이슬 내리니 병풍이 차가와라.
연꽃은 시들어도 밤에는 향기 여전하고
우물 가의 오동잎 지는데 그림자 없는 가을.
또드락 지는 물시계 소리 서풍에 들려오고
서리 내리는 발 밖에는 밤벌레가 한창이다.
베틀에 감긴 무명을 가위로 잘라내어
옥문관 임의 꿈을 깨니 장막이 허전하다.
말라서 옷을 지어 머나면 임에게 부치자니
쓸쓸한 등불이 어두운 벽 밝힐 뿐.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 써서
내일 아침 떠나는 배달에게 보내련다.
옷과 편지 봉하고 뜨락에 나가노라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별만 밝구나.
차디찬 금침에서 엎치락 뒤치락 잠 못 이루니
지는 달 정다워라 병풍 속을 엿보고 있네.
가을날의 허난설헌을 생각하면 슬픔이 밀려온다.
그녀의 가을날은 유난히도 외롭고 쓸쓸하였다. 을씨년스런 가을 기운이 스며드는 각씨방에 외롭게 앉아 달빛 영창에 젖어 가을소리만 가득한데 펼쳐진 금침은 추원만 가득하였으리라. 여자에게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던 그 시절 스스로 '초희'라 이름짓고 '난설헌'이라 호를 지어 그녀가 죽은 후에 오라버니였던 '허균'에 의해 모아진 210수나 되는 주옥같은 詩를 남긴 진보적인 여성이었다.열 다섯살에 시집와서 비극적 삶을 살다가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난설헌. 그녀에 대한 안타까운 사모의 정이 끊임없이 강물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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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실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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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창녀의 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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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참 많이도 고향을 봤지라우. 그저 꿈만 꾸먼 꼭 고향은 봄이어라우. 아매도 나가 고향을 떠날 때 봄이어서 그랑 모냥이요. 참꽃은 참꽃대로 온 산에 발갛게 타고, 논에는 자운영이 무신 공단이불모냥 질펀하게 깔레서 분홍빛으로 피어나는디, 저 아래 바다 쪽으로는 유채꽃들이 덩달아 피어서, 오메, 밤에도 마치 횃불을 킨 것맨키롬 환했어라우. 글다가 꽃들이 한끄번에 벙글어져서, 살구나무, 앵두나무, 복송나무, 배나무, 사꾸라나무, 그렇게 나무란 나무에 모다 꽃이 피어 갖고 마침내 꽃사태가 나먼, 오메, 가심이여, 멀리서 색깔만 봐도 가심부터 우선 벌렁벌렁 뛰놀던 그 환한 꽃들이 시방도 눈에 선하요. 그라먼 해종일 동무들끼리 대소쿠리 한나씩 들고 산에 들어 나가 살았지라우. 오메, 캐도 캐도 지천으로 깔레 있던 그 야들야들한 것들, 아이고, 야들야들한 것들이 어디 나물뿐이었간디요? 말만한 큰애기들이 부끄러운지 몰르고 아그들모냥 삐비도 뽑아 묵고, 찔레순도 꺾어 묵음시롱 공연시 그놈의 환한 꽃색깔에 가심에 바람이 들어 갖고 밤낮없이 몰려 댕김시롱 총각들 숭을 봤는디, 그때 그 가이내들, 영임이, 끝순이, 양순이, 막례, 순자....... 지끔 생각하면 그 가이내들이 바로 나무보다 더 야들야들했지라우." 인신매매꾼에게 잘못걸려서 꽃다운 청춘을 창녀로 보내야 했던 가엾은 여인. 비록 몸 파는 여인이였지만, 고향의 봄은 언제나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않는 영원한 향수으로 남아있었다. 지친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고향의 봄.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열 여덟살 적 고향의 봄을 노래하는 그녀의 짧은 넉두리속에서 어쩜 그리도 많은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잘도 피어나던지 삘기(삘기나 삐비나 같은 풀인듯..)를 뽑아 먹던 내 어릴적 추억도 함께 그녀의 봄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한 여인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향의 봄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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