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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옛 시조 모음

기타 시와 문학/시학

by 석란나리 2012. 11. 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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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1269~1343)

호는 매운당(梅雲堂), 충렬왕 12년에 향공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원나라에 여러번 내왕 했으며, 충선왕 모함 사건에 연류되어 무고하게 유배된 바도 있었으나 풀려 났음. 충혜왕이 복위하자 대제학에 이으렀으며 성질이 매우 곧고 깨끗하였다 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주제]봄날밤의 애상적인 감정을 나타냄

[낱말풀이]이화-배꽃, 월백-달이 환하게 비침. 은한-은하수. 삼경-한밤중,

밤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 일지춘심-나뭇가지에 움터 오는 새싹. 자규-

두견새,소쩍새. -사물과 자연에 대하여 느끼는 애틋한 정서.

[작품해설]배꽃이 하얗게 피어난 가지에 밝은 달이 비치어 꽃은 더욱 희어 보이고

 우러러 은하수의 위치를 살피니 한밤중이라 이 배꽃가지에 서려있는 봄 뜻을

 어찌 소쩍새 따위가 알라먀는 나의 이렇듯 다정 다감함이 무슨

병과 같아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출처] [시조]이화에 월백하고|작성자 해운대

 

 >매창뜸에 있는 매창의 무덤.

 

 

 

 

이화우 흩날릴 제...

-매창의 '겨울 사랑'

 


우리 옛시조 중 가장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조가 매창梅窓의 다음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는 배꽃이다. 배꽃은 갈래꽃이다. 변덕스런 봄바람이 한바탕 불어제끼면 낱낱이 떨어진 흰 꽃잎들이 마치 빗발처럼 난분분 허공을 비산한다. 그래서 이화우라 한다. 이처럼 이화우, 추풍낙엽 같은 동적인 소재, 그리고 봄에서 가을로 건너뛰는 장면 바뀜 등으로 위의 시조는 마치 한 편의 동영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는 듯하다. 절창이다.


그래서 이 시조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엔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소싯적 처음 읽었을 때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릇 명작의 뒤켠에는 아픈 사연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럼 매창이란 어떤 여인이며, 어떤 사연으로 이 시를 짓게 되었는지, 그 아련한 뒤안길을 한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매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직업은 기생이었다. 그 아비가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이라는데, 매창은 그마나도 첩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갈데없는 천출이다. 하지만 자질이 영특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특히 거문고 타기를 즐겨 상당한 기량의 연주 솜씨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어릴 때 이름은 향금香今이었는데, 기생이 된 후에 이름을 계랑桂娘으로 바꾸고 스스로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지었다. 매화꽃이 핀 창이란 뜻이다. 추운 겨울에 피는 꽃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시재詩才는 일찍부터 드러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다.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는 천출 처녀가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었으니 갈 길은 대강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이 되었던 것이다. 나이 16살 때였다.


거문고 연주가 빼어날뿐더러 시재까지 출중하다 보니, 이런 조합이 그리 흔치는 않다. 명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그녀를 보려고 멀리에서 소문을 듣고는 시인묵객, 한량들이 찾아왔다. 때로는 손님 중 술이 거나해지면 집적대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는 여인은 아니었다.


다음 '증취객贈醉客‘ 제목의 오언절구를 보면 그녀의 시재와 마음자리까지 오롯이 드러난다.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신석정 역)


하지만, 험한 세파에 일찍 몸을 실었으니, 인생의 쓴 맛도 일찍 찾아왔다. 현감에게 수청을 들었으나, 이윽고 버림받고 말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렇게 미모는 아니었다 한다.


이런 매창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선조 24년(1591년) 18살 때였다. 그런데 그 상대는 28살이나 연상인 유부남으로, 한양에서 이미 문명을 날리는 시인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었다. 그는 부안에 놀러왔다가 매창을 찾아온 것이다. 매창과 마찬가지로 유희경 역시 천민 출신으로, 같은 천출 시인인 백대붕과 함께 유 · 백으로 일컬어지며 문단을 주름잡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창이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유희경의 문명이 멀리 부안에까지 알려져 있었던 터이다. 유희경은 그날 매창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한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재주 노래솜씨 한성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허경진 역)


두 사람은 28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같은 천민이라는 데 더욱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천출이지만 유희경은 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상례에 아주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또한 화담 서경덕계의 문인으로 반듯한 선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이때 매창을 만나 평생 처음으로 ‘파계’를 했다고 한다.


얼마 후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통에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화우' 시조는 이 무렵 첫사랑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지은 것이다.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잎처럼 그들의 사랑도 덧없고 아름다웠으리라.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촛불'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하였다.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컫는 송도삼절을 본딴 모양이다.


어쨌든 유희경과의 첫사랑은 매창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녀는 천리 밖 정인을 모질도록 그리워했고, 그것은 나중에 서러움과 한으로 응어리지기까지 했다. 한양의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은 좀 다르지만,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이처럼 독한 사랑이었지만, 시절은 그네들의 편이 아니었다. 7년 전쟁의 참화가 조선땅을 온통 휩쓸고 갔으며, 전후에도 세상이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구러 10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줄곧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율곡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절의가 곧아 나중에 인조반정에 앞장서 공신이 된 인물이다. 이런 인물에게 매창이 마음이 끌려 그의 정인이 되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첫사랑 유희경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매창에게 두 번째 정인으로 이귀를 만났으나, 그 만남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환해宦海를 떠도는 이귀의 입장에서 매창을 수습할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남자마저 떠나보낸 매창은 사랑의 덧없음, 인생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깊이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 뒤 매창의 행로를 더터보면 그런 짐작을 아니 할 수가 없다.


그 무렵 매창의 상황을 보여주는 허균의 기록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유희경과 헤어져 있는 동안 당대의 대문호인 허균이 그녀를 만났고, 허균 역시 그녀를 사랑해 10년 넘게 사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허균이 매창에게 참선을 권하는 글을 쓴 점으로 보아 두 사람은 정신적인 사랑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은 비록 드날릴 정도는 아니나,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 만하였다. 하루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방으로 들였는데, 이는 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허균의 ‘조관기행漕官紀行’)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성을 뛰어넘어 오래 지속되었다. 매창은 허균과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으로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편지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 속 깊은 연모의 정을 품은 허균의 마음을 다음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변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그대는 반드시 웃을 거외다. 그때 만약 생각을 한번 잘못 먹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돈독히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북송대의 시인)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지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매창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 유희경과의 두 번째 만남은 15년 만에 이루어졌다. 매창을 잊지 못한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잠깐의 만남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뒤로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짐작컨대, 15년의 세월이 이미 두 사람의 얼굴을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오랜 옛사랑은 다시 찾을 것이 못된다. 그냥 마음속 깊이 간직함만 못하다는 걸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이 재회 후 매창은 3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37살의 한창 나이였다. 이승의 삶에서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음에 깊이 절망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창은 죽어서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유언에 따라, 평생을 끌어안고 살며 고락을 같이했던 자기 거문고를 안은 채 묻혔다고 한다.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았던 매창의 옆에 거문고가 끝까지 함께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소유였던 모양이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지 45년 만에 매창을 잊지 못하는 부안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 앞에 빗돌 하나를 세웠다.

 

그로부터 다시 13년 뒤에 부안의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그녀가 남긴 시 중에서 구전되는 58편의 작품을 목판에 새겨 인근 사찰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펴냈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찍어달라 하여 개암사의 절 살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말도 전한다. 매창의 시로서 유명한 작품은 앞서 말한 '증취객' 외에,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秋思', '춘원春怨', '견회遣懷',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시는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여성적인 정서로 섬세하게 읊으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매창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한 허균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 가도 변치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그중 한 편이 매창공원의 허균 시비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 ‘설도’는 당나라의 유명한 기생. 시에 뛰어나 백낙천 같은 유명 시인들과 잘 어울렸다. '동심초'의 원작자.


세월이 지나 매창 빗돌의 글씨들이 이지러진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그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도 먼저 매창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매창이 간 지 360여 년이 지난 1974년 어느 날, 매창뜸을 찾아온 시인 가람 이병기가 그녀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빈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한편, 매창의 첫사랑 유희경은 대시인으로 문명을 날리며 91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의 집은 경복궁 뒷담 너머 개울 가에 있었다. 가끔 궁궐 사람들이 담 너머로 그의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하얗게 늙은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고 한다. *

 

*참고: '우리 옛시조 여행(이광식 저)

          '기생시집'(문정희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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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식 엮음/가람기획 간

 

* 조선시대, 조선선비의 정신세계가 숨쉬는

우리 옛시조로 떠나는 조선시대 시간여행

* 우리 옛시조 중 걸작 160수 수록

* 관련 유적지 사진 158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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